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이맘때쯤이면, 꽃 구경할 생각에 괜스레 설레기 마련이죠. “○○님의 신청곡, ‘벚꽃 엔딩’ 듣고 올게요”라는 라디오 DJ들의 멘트도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반가운 손님, 벚꽃! 올해는 평년보다 1~2주 빨리 볼 수 있을 거라고 해요. 24일경이면 제주에서 올해 첫 벚꽃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벚꽃의 계절’이라 불리는 4월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시간에는 우리나라의 벚꽃, 벚나무와 관련된 숫자 상식 네 가지를 알아볼까 해요. 지금부터 ‘벚꽃 비기닝’을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벚꽃축제 명소 중 한 곳인 경남 진해에 핀 벚꽃
첫 번째 숫자 #265
우리나라 최고령 왕벚나무는 265세
우리나라에는 세계 유일의 왕벚나무 자생지가 형성돼 있습니다. 바로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천연기념물 156호)와 제주시 봉개동(천연기념물 159호), 전라남도 해남 대둔산(천연기념물 173호)입니다. 벚꽃축제 때 볼 수 있는 벚나무들, 즉 가로수로 식재된 커다란 벚나무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 왕벚나무 종이에요.
265라는 숫자는 한국의 최고령 왕벚나무의 수령(樹齡)입니다. 국립산림과학원 제주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가 2015년 3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제주 한라산 전역을 조사한 결과, 200그루에 달하는 왕벚나무가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요. 그 가운데 265년 된 나무도 포함돼 있습니다. 나이만 가장 오래된 게 아니라, 그 크기 또한 현재 알려진 국내 왕벚나무 가운데 최대라고 해요.
봄이면 만개하는 제주도의 왕벚꽃
두 번째 숫자 #2000
창경궁의 벚나무 2천 그루가 모두 뽑힌 까닭
1984년 창경궁(당시 궁명 창경원) 복원 공사 당시, 궁내에 식재돼 있던 벚나무들이 모두 뽑혔습니다. 그 수가 2천 그루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이 많은 벚나무들이 왜 뿌리째 제거된 걸까요? 바로 1907년 일제가 심어놓은 나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907년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해이기도 하죠.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부터는 창경궁에서 ‘야앵(夜櫻)’이라 불리는 행사가 열렸는데요, 이 ‘앵’자가 바로 ‘벚나무 앵’입니다. 야앵은 ‘밤중의 벚꽃축제’, ‘한밤의 벚꽃놀이’ 정도로 의역될 수 있죠. 이 야앵 행사는 1945년 광복 후에도 이어지다, 1984년 2천 그루의 벚나무들과 함께 사라지게 됐습니다.
창경궁에서 제거된 벚나무들 중 일부는 여의도 윤중로에 옮겨 심어졌다는 사실!
세 번째 숫자 #1954
이중섭이 그린 1954년의 벚꽃
우리나라 근대 서양화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화가 이중섭의 대표작 <소>가 이달 초 한 경매시장에서 무려 47억 원에 낙찰됐습니다. <소>는 미술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낯익을 만큼 대단히 유명한 유화 작품이죠.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 이중섭 1916~1956>가 열렸습니다. 당시 미술관 측은 관람객 547명을 대상으로 전시장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유화 작품을 물었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중섭 화가의 대표작인 <소>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벚꽃 위의 새>라는 작품이 가장 많이 응답된 것이었죠.
벚나무 가지 하나, 그 위에 앉은 흰 새와 파란 개구리, 가지 주변을 날아다니는 노란 나비, 떨어지는 꽃잎이 그려진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쓸쓸하면서도 평온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려진 해인 1954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해, 이중섭은 제주 서귀포에 머물고 있었다고 하죠. 흰 새의 발밑에서,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벚꽃 잎들의 이미지가 왠지 처연해 보입니다.
이중섭 <벚꽃 위의 새> 1954年 作
이미지 출처: 공유마당
네 번째 숫자 #80000
팔만대장경에도 쓰인 벚나무
우리나라와 일본 식물학계 사이의 벚나무 원산지 논란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수종(樹種)은 왕벚나무인데요, 1939년 일본의 한 식물학자가 일본의 왕벚나무는 오래전 한국의 제주산을 들여와 심은 것이라고 발표하며 논란이 쟁점화되었죠. 일본은 2007년 미국 농무성에 한일 각국의 왕벚나무 유전자 분석을 의뢰하기도 했습니다. 두 나라의 수종 모두 고유한 종, 즉 별개의 종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요. 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왕벚나무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아 학계의 원산지 논란은 현재진행형인 셈입니다. 지금은 중국까지 원산지 논란에 가세했는데요, 2015년 중국벚꽃산업협회가 왕벚나무를 비롯한 야생 벚나무 상당수의 원산지가 바로 중국이라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죠.
한중일 세 나라가 오래전부터 벚나무를 매우 아껴왔다는 사실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벚나무 껍질이 군수물자로 취급됐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남아 있다고 해요. 당시 조선군의 병기였던 활을 제조하는 데 벚나무 껍질이 쓰였다고 합니다. 또한,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 장판의 절반 이상이 벚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죠.
60% 이상이 벚나무로 만들어진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 장판
이미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식의 향기로 꽃내음은 더욱 짙어지고
우리나라의 벚꽃과 벚나무에 대한 네 가지 상식들을 숫자를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렇듯, 어떤 한 대상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은 그 대상과의 거리를 좁혀가는 일이기도 하죠. 해마다 벚꽃은 피고, 또 집니다. 오랫동안 피고 진 그 꽃의 긴 시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는 것도 꽤 운치 있는 꽃구경이 아닐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벚꽃 엔딩’이 아니라 ‘벚꽃 네버 엔딩’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읽어볼 기사들(이 글이 참고한 기사들입니다.)
「한라산 전역에 왕벚나무 자생..최고 수령 265년」(연합뉴스, 2017.04.03)
「'벚꽃 좀비'가 돌아오는 계절··· 사랑도 오려나?」(조선일보 뉴스Q, 2017.04.07)
「[이중섭, 백년의 신화]1위는 '황소' 아닌 '벚꽃 위의 새'」(조선일보, 2016.08.15)
「[팩트체크] '벚꽃 논쟁' 중국까지..진짜 원산지 어디?」(JTBC 뉴스룸, 2015.03.31)
「벚꽃 ‘한-일 원산지 논쟁’ 왜 끝나지 않나」(한겨레, 2015.04.03)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봄의 상징인 '벚꽃', 원래는 군수물자였다고요?」(아시아경제,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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